* 사진을 찍는 것 - 기억을 남기는 일, 기억을 방해하는 일.
마졸리에 식사하러 간 날 기분 좋게 석양을 보고 사진을 찍고 테이블에서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들어왔다. 우리 테이블은 가장 해변쪽에 가까운 테이블은 아니고 그 뒷줄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우리 바로 앞에는 테이블은 없는 좌석. 그 한 무리의 관광객들은 들어오자마자 모두 우리 앞쪽으로 나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완전히 어두워진 것은 아니지만 해는 대강 다 지고 난 무렵이라 계속 플래쉬가 터지고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나오지 않는 식사를 기다리며 앉아있다보니, 아까 사진을 찍고 있던 스스로가 대단히 싫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짜증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을까? 혹은 사진 찍는데 급급해서 스스로의 경험에 마음을 집중하지 않고 있었을까?
아쿠아에 후기나 리뷰를 올려야지라는 마음을 먹으면 어느 정도는 강박적으로 사진을 찍어야 한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이성으로 억제하며 일단 한컷 찍어야 하고, 피곤해도 정리된 침대 먼저 한컷 찍는 때가 많다. 즐거운 의무감 비슷한 것을 느끼는 것 같다. 그건 나쁘지 않다. 리뷰가 아니더라도 잘 나온 사진은 여행의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마음을 기쁘게 만든다. 또 여자라면(아마 남자라도..) 누구나 자신이 예쁘게 나온 사진도 갖고 싶기 마련이겠지.
그런데 어느 순간에는 여행의 목적이 그것인양 주객이 전도되고 지나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디지탈 카메라 광고 카피처럼 ‘기록이 기억을 지배’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아주 좋은 추억의 순간들은 사진과는 다른 때에 있는 경우도 많다. 나는 대부분 구체적인 풍경이나 사실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과 큰 그림만으로 기억한다. 단 둘이 정원에서 마주 앉았던 룰라의 점심 시간은 맛있는 음식과 바람 소리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움직이던 그늘로. 늦은 밤 방 앞의 선베드에 거꾸로 누워 별을 보며 남편이 끓여서 서비스해주는 차를 마시는 느긋한 기분과 바람을 기억하고. 라루치올라 앞에서부터 깜깜해진 해변을 둘이 손잡고 오는 밤을. 발리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남편에게 생일 축하한다고 말하던 상냥하고 아름다운 더 레기안 콘시어지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사진에 들어있는 장면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다 말해지지 않는 감정의 혼합체가 여행의 기억에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석양의 기쁨은 잠시였고, 어수선함과 아쉬움만 많이 남은 저녁이었다. hu’u에서 기분 좋게 한잔 하고, 호텔에 들어와 남편이 풀코스로 서빙해준 나이트 티에 마음이 풀어 지지 않았으면 길고 길었을.
* Still got the Bali blues.
7일째다. 내일 발리를 떠나 싱가폴로 간다고 생각하면 역시 울적해진다. 조금 익숙해진 우붓을 떠났고, 조금 익숙해진 스미냑을 떠나고, 낯선 싱가폴을 잠깐 들리고 나면 늘 알던 거기, 서울이다. 서울도 조금쯤은 낯설어져 있겠지.
해가 지는 것은 발리도 서울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리워지겠군. 꽃이 떨어지는 소리.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는 곳.
오늘 The Legian은 누군가의 결혼 기념일을 축하하는 식과 리셉션이 있어서 준비가 한창이다. 원래 이런 행사를 유치하지 않는데 단골 손님의 특별 케이스라 양해 바란다는 안내문이 와있었다.(안하면 어쩔거냐..) 누군지 모르겠지만 발리가 마음에 특별한 두 사람이 계속 행복하게 살아가게 되길 빈다.
황혼녘이 되니 여기 저기에 불이 켜지고 멋지게 차려입은 손님들이 레드카펫처럼 등장해서 해변가 칵테일 리셉션을 하고 있다.
그걸 바라보면서 어쩔 수 없이 센티멘탈 모드 ON.
그리고 사실, 부러움 모드도 ON.
여행이 끝나가고 있구나.
p.s. 발리 단상에 들어간 글들은 발리 현지에서 쓴 것과 돌아와서 쓴 것들이 섞여있습니다. 시제가 오가도 그냥 그러려니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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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lip 2005/11/16
발리 단상이 끝났으니 다음은 싱가폴 단상인가요? +_+
사실 사진에 대한 것이 그래요. 몇년만 지나도, 사진 들여다보면서
이 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진을 찍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을때도.
그래도 이쁜 사진보는 것은 즐겁군요. ^^;
ps. 리를오라버니 생일 축하드려요-
앨리스 2005/11/28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함께 하는 매일도 특별한 일상이겠지만
같이 떠나는 여행이야말로 하나라는 이름의 우리 라는걸 실감하게 해주지 않을까 합니다.
두분이 함께 한 시간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켜켜이 쌓여가는데 사진은 그저 거들뿐 ^^
늦었지만; 윙오라버니 생일 축하드립니다.
좀 한가해지지면 연말정산집회라도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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